(가) 자, 다시 그림을 감상하시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떻습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예술 작품엔 위대한 작품이 있고, 또 사랑스러운 작품이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은 정색을 하고 똑바로 서서 박물관 같은 곳에서 바라보기에 걸맞은 것이라면, 사랑스러운 작품은 이를테면 나만의 서재에다 걸어 놓고 늘상 바라보면 마음이 참 편할 것 같은, 그런 그림을 말합니다.
그림이 텅 비었죠! ㉡겨우 화면의 5분의 1 정도밖에 그리지 않았습니다. 남자 어른 키만 한 큰 그림인데 어떻게 화가는 요만큼만 그리고 그림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역시 서양식으로(강사: 좌상에서 우하로 비스듬히 그어 보임.) 보면 X 자만 그려집니다. 이렇게 우리 식으로 비껴 보면(강사: 우상에서 좌하로 사선을 그어 보임.)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잡히게 되죠.
(나)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우희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보이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어떻습니까? 시조의 경계가 이 그림하고 아주 똑같죠? 언덕 중앙 부분만 초점이 잡혀서 분명하고 주변으로 갈수록 어슴푸레하게 보이고 뿌예지면서 여백 속으로 형상이 사라집니다. 이 꽃나무 언덕의 모습을 만약 동자가 보았다면, 아주 깨끗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노인이 늙은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여기만 겨우 분명히 보이는 거예요. 이거 정말 기가 막힌 작품 아닙니까? 사람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영상을 끄집어내어, 보는 그 사람과 함께 그렸습니다.
(다) 글씨를 보니, 김홍도 이분이 글씨를 굉장히 잘 쓰시는 분인데 글씨에 약간 기운이 없습니다. 늙었어요, 많이 늙었습니다. ㉢ ‘노년화사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이라는 글씨, 즉 ‘늙은 나이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라는 말입니다만, 글씨만 보아도 단원 이분이 환갑이 다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라) 아래쪽 주인공을 보십시오. ㉣ 데생이 아주 간단하고 머리 같은 건 아예 중간 붓으로 한번 툭 찍어서 타원형 살색 점 하나로 표현하고 말았습니다. 그 앞의 동자는 또 눈만 콕 찍고 그만이지요. 이걸 제가 박물관에 전시해 놨더니 초등학교 1학년쯤 되는 꼬마 둘이 와서 보다가는 이렇게 말해요. 얼른 자기 친구를 부르면서, “야, 이 할아버지 봐라.” 그리고 뭐라고 하냐 하면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는 달걀귀신할아버지다!” 그러면서 둘이 깔깔대고 웃는 겁니다. (청중 웃음)
(마) 아이들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그런데 이 녀석 이목구비도 없는 사람이 노인인지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홍도가 그림 그릴 줄 몰라서 이렇게 그렸겠습니까? 옛날 화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먼 산에는 나무가 없고, 먼 강에는 물결치지 않고,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겐 눈이 없다.” 즉 멀리 있는 것을 그릴 때 자세하게 그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여기 노인이 계시다, 그 앞에 동자가 있고, 중간엔 조촐한 술상이 놓여 있다.’ 이렇게 슬쩍 운만 띄우는 것이 점잖고 격이 높지요.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부분입니다. ㉤ 여기 배를 그렸는데, 그 배를 내려다보이게 하지 않고 마치 물속에서 올려다본 것처럼 그렸다는 점입니다. 이게 아주 기막힌 점이에요. 노인이 하염없이 꽃나무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화가 역시 그 노인의 마음에 완전히 공감하고 있다는 감정 이입의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해서 물 아래에서 위로 치켜 본 듯하게 그렸습니다. 정말 멋집니다.